"인공지능이 내 일자리를 빼앗을까?" 많은 분들이 이 질문을 던지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기술의 발전이 단순히 우리의 '일'을 대체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을 뒤흔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 바로 '욕망의 구조'를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가치, 창의성의 가치, 심지어 인간 존엄성의 가치까지 흔들리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은 이 거대하고도 내밀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 노동의 종말이 다가옵니다

사실 노동의 종말이라는 말은 이미 1995년, 만 30년 전에 나온 제러미 리프킨의 책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징후가 현실이 되는 한가운데 놓여있습니다. 디자인, 영상 편집과 같은 창의적인 영역에서조차 AI는 놀라운 속도로 인간의 영역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사무직의 종말을 넘어섭니다. 스스로 학습하는 물리적 로봇이 등장하면, 산업 재해나 4대 보험 같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로봇이 인간 노동자를 모든 물리적 영역에서 밀어낼 것입니다.

물론, 수백 명의 석학들이 AI 개발 중단을 외쳤지만, 막대한 이윤이 걸린 국가 간의 '초경쟁' 상태에서 이 흐름을 멈출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앞으로 10년에서 15년 내, 우리가 마주할 현실은 '대량 실업 사태'입니다. 선진국들은 아마도 폭동을 방지하고 사회를 봉합하기 위해 기본 소득 제도를 도입할 것입니다. AI로 막대한 부를 쌓은 기업에 세금을 부과해 그 재원을 마련하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과연 해결책이 될까요?

노동에서 '해방'된 자들의 공허: 욕망의 무중력 상태

문제는 경제적인 생존 너머에 있습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왔습니다. 노동은 생계유지 수단이자, 가족 부양이라는 의무였고, 때로는 삶을 승화시키는 도구였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노동에 우리의 자유를 저당 잡히고, 남는 여가 시간에 삶의 즐거움을 찾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노동'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최소한의 기본 소득으로 연명은 가능하지만,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어진 사회. 이는 축복이 아니라 '욕망의 무중력 상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거대한 공백은 감당할 수 없는 혼돈(카오스)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가장 깊은 몰락: '초월적 가치'는 어떻게 붕괴되는가

대량 실업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가치의 몰락'입니다. 이전에도 신이나 종교 같은 초월적 가치의 몰락은 논의되어 왔지만, AI 시대의 몰락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적어도 '인간의 창의력'이나 '예술적 영감'만큼은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라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AI가 톨스토이보다 깊이 있는 소설을 쓰고, 피카소보다 경이로운 그림을 순식간에 그려내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한 창조성이란 사실 우리가 신성시했던 '영감'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고도의 '조합과 연산'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과거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패배한 뒤 은퇴했을 때, 우리는 그의 '천재성'이 결국 기계로 정복될 수 있는 치열한 '수련'의 결과였음을 어렴풋이 목격했습니다. 천재성이라는 신화, 영혼의 깊이라는 신념이 사실은 인간만의 환상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별게 아니었구나'라는 인식은 예술을 넘어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추상적 가치(존엄성, 깊이감)를 공격하고 무너뜨릴 것입니다.

더 이상 '속지 않는' 자들의 방황이 시작되다

우리의 욕망은 언제나 '가치'에 의존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을 욕망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굳게 믿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사랑이 눈에 보이는가? 계산할 수 있는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근본적인 상실감(어머니로부터의 분리)을 안고 살아가며, 이를 보상받기 위해 사회적 인정, 존엄성,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에 의존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가치들이 모두 몰락한다면, 우리는 상실의 구덩이를 메꿀 그 어떤 가능성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과거의 현자들은 이러한 시대를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하는 시대"라고 예견했습니다. 과거에는 사랑, 애국심, 존엄성 같은 가치에 '속아' 넘어갈 수 있었기에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증명 불가능해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 똑똑해져서 그 어떤 보편적인 가치에도 '속지' 않습니다. 그리고 속을 만한 가치조차 사라진 텅 빈 세상에서, 우리는 그저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텅 빈 공백을 메우는 소비주의의 함정

과거에는 종교, 효 사상, 노동, 예술,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상실감을 보듬고 애도하는 기제로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가 해체되고 가족마저 더 이상 삶을 지탱하는 만족의 공간이 되지 못하면서, 우리는 즉각적인 보상을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 빈자리를 파고든 것이 바로 '소비 사회'입니다. 우리는 유튜브를 스크롤하고,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며 상실감을 잠시 망각합니다. 하지만 그 유효기간이 끝나면 즉시 또 다른 보상을 찾아 헤매는, 끝없는 소비의 부속품이 됩니다. AI 시대는 이러한 즉각적인 보상 요구를 더욱 강화하며, 불안을 거부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소비로 도피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노동하지 않고, 가치를 믿지 못하며, 가족도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하는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해결의 실마리는 '기술(Technology)'이 아닌 '기예(Technē)'에 있습니다. 기예란 존재를 건 과정과 연마를 통해 삶을 이끌어 가는 창조적 기술을 의미합니다. 사회나 문명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욕망의 방향을 제공하지 않기에, 우리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발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AI는 재화의 증가를 계산할 수는 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계산 가능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의 의미를 규정하고 발명할 권한은 오직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추상적 가치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고립될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고립의 지점에서 새로운 욕망의 기예를 창안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가 발생합니다.

당신의 '증상'을 창조의 잉크로 바꾸는 기술

그렇다면 이 새로운 욕망의 기예는 어떻게 연마할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그 답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증상'에 있습니다.

우울, 불안, 강박과 같은 우리의 '증상'은 사실 외부의 상징(가치)에 순순히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나만의 가장 고유한 힘입니다. 이 증상을 단순히 제거하려 한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웠을지언정 가장 '나다운' 욕망의 힘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증상을 시대를 살아가는 욕망의 기예로 전환시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매일 자신의 삶이라는 '소설'을 써 내려가는 존재입니다. 과거에는 아버지 세대가 살았던 방식, 사회가 정해준 '스탠더드 모델'의 이야기를 그저 흉내 내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계가 완전히 바뀌어 예전의 '가족 소설'을 변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발명이 강제되고 있습니다. 이 발명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극도의 우울과 불안 속에서 소비 품목을 탐닉하며 삶을 연명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진정한 소설가'가 될 것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 '근본 환상'의 바닥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나의 고유한 '상실'과 '공백'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백을 억지로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 자체를 새로운 창조의 출발점으로 삼아 '나만의 고유한 이름'을 발명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우리가 연마해야 할 유일무이한 '욕망의 기예'입니다.

텅 빈 옥좌 앞에서, 진정한 소설가로 거듭나기

인공지능 시대는 우리를 텅 빈 옥좌 앞에 세워놓았습니다. '가치'라는 이름의 왕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극도의 불안을 안고 소비의 노예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그 텅 빈 공백을 기회로 삼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소설가'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타자의 욕망(고정관념)을 거부하는 것이 주체적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거부할 타자의 욕망조차 사라진, 텅 빈 공간에 던져졌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욕망을 '발명'해야 한다는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